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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칠곡(漆谷)의 유래를 찾아서

기사입력 2015.10.2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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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팔거리(八居里)지명이 고려 현종9년 팔거현(八莒縣)으로 승격되면서 별칭 칠곡(七谷) 이름이 처음 나타난다.

     

    특이함은 거주 거(居)자가 감자 거(莒)로 바뀐 지명이 구전과 문헌에도 없어 알길 없으나, 공자가 사모한 주나라 무왕이 문무(文武)를 겸한 신하를 제후로 승격 할 때 봉토(封土)를 하사한 땅 이름을 거(莒)라하고, 춘추전국시대에 황하(黃河) 중원에서 막강한 제(齊)나라가 합종연횡 연(燕)나라에 70개성을 뺏기고 마지막 요충지 거성(莒城)에서 살아난 길지(吉地)이기에 주역(周易)팔괘에 의한 좋은 지명을 점지한 팔거(八莒)의 택명이 아닐까 유추해볼 따름이다.

     

    조선후기 인조실록에 가산산성을 구축 팔거현이 칠곡도호부(柒谷都護府)로 격상되면서 칠곡(柒谷)이라는 말이 나온다.

     

    칠(柒)은 우리말 칠(七)이기도하면서 경산지와 대동여지도등에 병행 기록되어 오다 순조이후 근세 일본식민 지배를 당하면서 칠곡지에 “七峰山在架山 七峰作谷爲 邑基此 故號曰漆谷云-” 즉 가산의 다른 이름은 칠봉이며 7계곡을 합하여 불러온 옛 칠곡(柒谷)읍 터를 칠곡(漆谷)이라 부른다.

     

    칠곡 명칭 변경의 결정적 역할은 일제 총독부 치하에 빼앗긴 금수강산을 수탈 강점하고자 동양척식회사라는 지적 측량회사를 설립하여 조선전국 지도를 만들고 옛 지명 유래와 풍수지리 명당의 맥이 흐르는 우리고유의 민족혼을 말살하고자 의도적으로 전국의 좋은 명칭을 많이 바꾸고 백두대간 정맥과 기맥을 단절하면서 이 고을 또한 옻 칠자 칠곡(漆谷)으로 명칭변경을 강제 당했다.

     

    가산은 902고지 중심 산중 고원분지를 형성하며 807고지 동곡성(東曲城) 일대 772고지 남포루(南包壘) 863고지 동문과 중문사이 요충 877고지 중문 남쪽 862고지 내성과 치성 851고지 가산 바위 등 7개 높은 봉우리를 연결 칠곡도호부가 탄생 경산부(성주)속현인 팔거현이 독립 승격되어 180년간 산성읍치가 존속되었지만 조선 말엽 순조임금 이후 다시 산성을 내려와 팔거현으로 환원되었다.

     

    근대사에서 팔거현은 또다시 대구시 북구 읍내동 행정지명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칠곡이라 부르고 또한 가산(칠봉)에서 발원한 원류가 그 옛날 8고을 삶의 터전 팔거현(八莒縣)이 팔거천(八莒川)으로 개명하여 금호 낙동강을 만나 유유히 흐르고 있다.

     

     

    2015년 10월 26일 매원 향토사학 곡촌 이수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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