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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가산산성과 승려 총섭(總攝)대장

기사입력 2015.10.13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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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축조된 가산산성은 내성 외성 중성의 3중곽(三重郭)형태로 보기 드물게 3대 임금(이조 영조 숙종)100년에 걸쳐 쌓은 내륙의 중요 산성이기에 이조실록은 “漆谷山城 形勝 百培於南漢 嶺南第一關防”으로 즉, 가산산성은 한양의 남한산성보다 백배의 가치를 더한 영남제일 관방의 요새라 예찬하고 임진왜란 당시 소야원(다부동) 고개와 문경새재인 조령고개(박달재)만 잘 지켰으면 한양도성이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 인조임금은 한탄했다.

     

    가산산성 완성과 함께 칠곡 도호부 승격으로 경상감영 역할까지 맟다 보니 방어와 수비에 많은 병력이 부족하면서 승려들을 강제로 징집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는 조선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했기에 노비 천민으로 전락한 승려들을 무자비(無慈悲)하게 동원 하였다.

     

    산성 내 수검당(壽檢堂) 합월당(合月堂)등 4곳에 승병(僧兵)숙소를 마련하고 통천사(通 泉寺) 정천사(淨泉寺)등 여러 곳에 승창(僧倉)을 두었으며 숙종은 외성을 다시 쌓으면서 천주사(天注寺)를 지어 승병 전용 승창미(僧倉米) 까지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매년 승려들을 모집 무술을 가르치며 춘추(春秋) 경연대회에서 총섭(總攝)이라는 승병대장을 뽑아 운사헌(雲師軒)전용 지휘 관사까지 두면서 4대 문루 사수와 함께 산성 내 중요 군사시설은 물론 성벽수리 개축 등 많은 잡역을 총섭스님이 관장 하였다.

     

    이와 같이 최근 문화제 발굴 천주사 폐사지에서 “順治十年 甲午四月 八空山 松林寺”라는 숙종임금 대의 명문 기왓장이 나와 가산산성과 송림사는 깊은 인연이 있음을 증거하며 칠곡 성주 옛 이름인 경산지(京山誌)에도 왜군 2차 침입 정유재란 시 송림사 고찰은 불에 타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숙종 대에 가산산성의 별칭인 기성(箕城) 즉, 칠곡에 태어났으며 서산대사의 법제자로 조선 중후기 고승인 기성대사(箕城大師)가 다시 개축을 하고 후기조선 (1830년)에는 가산산성 총섭 조화스님이 제 중수를 했다.

     

    칠곡 최고의 고찰 송림사는 신라 진흥왕대에 중국유학 명관대사가 많은 불교서적은 물론 귀한 부처님 사리까지 가져와 호국안민(護國安民)염원과 함께 일찍이 2000년 전 칠곡 호국을 상징하며 5층 석탑(보물189호)에 사리봉안 건립했으며 근세 석탑 보수 시 귀한 문화제가 다량 출토되기도 했다.

     

    또한 많은 문화재를 간직한 칠곡 호국의 원조 송림사는 병자호란 때 몽고군에 소실 방치되기도 했으나 고려 의천 대각국사에 의하여 대중 중창불사를 크게 일으킨 애환과 역경을 무수히 지켜낸 송림사와 함께 민족의 비극 6,25동란을 극복한 칠곡의 수문장 가산산성 호국의 명승지는 많은 승려 승병과 함께 역대 총섭스님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 했다면 우리는 그 고마움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2015년 10월 10일 매원 곡촌 (향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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