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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금오산 갈항사(葛項寺)

기사입력 2015.08.14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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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오산 자락 김천 남면 오봉(梧鳳)동, 일명 갈항 마을에 들어서면 500여년 우람한 수령의 당산나무가 동내 어구를 지키고, 마을을 따라 금오산 둘레 길을 돌아보면 유난히 동 제사를 지낸 신목(神木)들이 많은 것은 상고시대부터 금오산이 대본산(大本山), 곤산(昆山), 대목(大木)으로 이어지면서 받들려온 숭산(崇山)사상 때문이 아닐까?

     

    칠곡군의회 의장을 지낸 유영록 어른의 이야기는 일본 총독부 시절 순사들이 배를 만든다며 전쟁물자로 당산나무를 베어간 수탈의 아픈 수모를 당했기에 숭오(崇烏)리 동민전체가 서릿발 같은 경찰서를 찾아 격렬한 항의대모를 하였다면서, 지금도 동네어귀에 무성한 당산나무는 대를 이어온 아들 나무라고 한다.

     

    마을 안길을 따라 한적한 오솔길 갈항사를 찾아 가노라면 영남팔경의 빼어난 군자답게 금오산 암벽의 웅장한 산세가 예사롭지 아니하다.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봉황이 벽오동에만 깃든다는 오봉(梧鳳)마을 갈항사는 국보급 문화제가 발견된 유서 깊은 귀중한 신라의 고찰이었다.

     

    고려시대 몽고군과 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으로 절이 소실되고 문화제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와 폐허의 방치로 나라에서 겨우 본존불만 과수원 가운데 보호각을 세워 마을주민이 열쇠를 관리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이후 불국토의 국력이 융성한 시절이라 부처의 모습 또한 풍만하며 전란의 모진 풍파에 양손이 비록 떨어져 나갔지만 동자승같이 천진한 천년의 웃음을 간직 한 체 반갑게 길손을 맞이한다.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과 건립연대를 같이한 갈항사 3층 석탑(국보99호) 기단부에 보기 드물게 명문으로 새겨진 내용은 692년 신라 효소왕때 화엄종 승전대사가 갈항사를 건립하고 758년 경덕왕때 문황태후 경신태왕이 경주 아닌 멀리 곤산 대목에 불국토를 염원하며 왕실의 보호사찰 경내에 3층 석탑을 건립했다고 한다.

     

    갈항 마을 사람들은 야산에 논밭을 일구다가 목이 잘린 부처를 발견하고 안타까움에 겨워 밭둑에 비 가림 없는 보호막 철책과 돌담으로 야단법석을 만들어 비로자나불을 안치하였다. 없어진 부처의 머리 부분은 새로 만든 흔적이 뚜렷하고 무릎까지 깨어진 안타까운 천년의 참모습 처연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통상적 부처의 결과부좌 한 자세는 왼손을 무릎에 내리고 손가락으로 마귀를 누르면서 오른손은 가볍게 들어 자비를 구하는 즉, 항마(降魔)촉진이 보편적 부처의 모습이지만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결연한 나라의 평화와 백성의 국태민안을 작심한 듯 멀리 서방정토를 향한 성스러운 서원의 모습이기에 주민들은 정성으로 작은 제단을 만들어 오늘도 냉수 한 그릇과 작은 촛불이 혼미한 세상의 연등불같이 삼복더위를 지키고 있었다.

     

    2015년 8월, 향토사학 매원 곡촌 이수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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