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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세종대왕 영능(英陵)은 이인손의 묘터

기사입력 2015.07.0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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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말 충신의 대명사인 3은1둔(포은·야은·목은·둔촌)으로 광주(廣州)이씨 중흥조 이집(둔촌)의 손자 이인손은 장남 영의정 이극배를 비롯하여 종반들이 모두 정승판서의 반열에 올라 당시 명문세도가로 8극조정이라 불렀다.

     

    세종의 손자 단종이 삼촌 세조에게 피의숙청으로 왕위를 뺏기고 궁중대소사에 불행한 액운의 사건이 자주 발생하면서 그 원인이 세종대왕 능자리가 흉한 터라하여 세조의 아들 예종은 왕실의 안위와 권위를 회복하고자 전국 풍수를 불러 명당을 찾아 나섰다.

     

    이인손의 묘는 천하 명당자리라 묘를 쓰면서 관리하는 제사를 짓지 말라고 유언했는데 8극 종반형제의 막강한 명예와 체면 때문에 규모를 축소하여 작은 제사와 다리를 놓았다.

     

    왕명에 의하여 명당을 찾아 풍수들이 전국산천을 헤매던 산길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잠시 묘막에 비를 피하고 날씨가 개이면서 청명한 산자락에 위치한 묘 자리가 천하명당으로 비(碑)문은 이인손의 묘였다.

     

    예종은 광이 형제들을 왕궁에 불러 어주를 권하면서 은근히 부모의 묘 자리를 요구했다. 아무리 왕의 신하이지만 조상의 묘 자리는 뺏길 수 없다는 완강한 동생들 불만에 왕명을 거역하면 역적으로 삼족을 멸하는데 아니 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맏형 영의정 이극배는 동생들을 달래어 이장을 하였다.

     

    묘 자리를 파니 “단지대왕 능 지묘”(短止大王 陵 之墓)라는 기름먹인 비단 천이 나왔다고 한다. 세종임금은 한쪽다리가 짧았다고 하며 대왕을 이장하면서 오늘까지 영능이라 부르고 있다. 여기서 연(鳶)을 날려 떨어지는 자리에 묘를 쓰면 왕의 천하명당은 아니라도 정승 명당자리는 된다고 하였다. 오늘도 이인손 묘 자리 지명을 연이 떨어진 연주리라 부르고 있다.

     

    이인손의 후손중 대표적 인물은 조선 5대정승의 한분으로 율곡에 앞서 왜구의 침략을 예고한 이준경(동고)과 영의정 이덕형(한음)은 임진왜란당시 1등 공신으로 중국 명나라 사신으로 구원병을 청하여 나라를 구했으며 그 후손들은 조선500년 역사에 수백 명을 등과시켜 동방 지 갑족의 명예와 함께 오늘도 칠곡과 보성에 집성촌을 이루면서 근대사에도 칠곡 출신 이수성 총리와 보성출신 이용훈 대법원장이 광주이씨 출신이다.

     

    2015년 7월 향토사학 곡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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