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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약목(若木)의 천년역사와 태조 왕건

기사입력 2015.06.13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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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은 기병 5천을 거느리고 후삼국 통일의 최대 격전지였던 팔공산 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충신 신숭겸을 잃고 참패를 당하면서 지금의 약목인 대목(大木)에 단신으로 도망쳐 지방호족 세력의 비호를 받았다. 견훤은 백포산성(柏浦山城) 금오산성(金烏山城)까지 추격해왔으나 지금의 약목인 대목의 관할구역 토후세력에 의하여 저지당하고 넓은 들판의 곡식만 군량미로 많이 거두어 돌아갔다고 사기(史記)는 전한다.

     

    삼국사기에 후삼국통일 직전 혼란한 난세에도 고려창업 태조 왕건은 요충지 대목청(廳)으로 어차 하여 5일간 머무르면서 일선에서 직접국사를 집행한 기록이 있으며 이때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고려에 귀속되기 전으로 고려창업 일등공신 성주의 벽진 장군과 함께 이미 대목군 지방 호족 또한 고려와 협력의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태조 왕건은 자가 약천(若天)이며 약(若)자는 용중의 용인 용왕을 말하며 불교적 의미는 지혜와 깨달음을 상징한다. 후삼국의 맹주 궁예와 견훤을 치열한 쟁패전으로 굴복시킨 태조 약천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하고 개국공신호족의 딸들28명을 선린우호 정책 왕비로 간택하고 구사일생 은혜의 보답으로 옛 지명 대목(大木)의 대(大)를 빼고 지혜와 용을 상징하는 왕 이름 첫 약(若)자를 넣어 약목(若木)의 새 지명은 좋은 인연으로 탄생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조선 초기 성현(대제학 청백리)의 어사 약목현 탐방시 시(詩)한수가 돋보인다. 古縣亭翠 麥崖黃雲 蟹螯飣近江 즉, 약목현청 정자의 정취어린 운치에 저 멀리 언덕아래 누런 보리익음의 석양노을 구름 따라 갈무리한 개와 자라의 귀한반찬 오르니 여기가 비로소 취흥의 강가임을 알았네!

     

    역사의 흥망성쇠는 귀한 신라와 로마제국 천년역사도 소멸 된지 오랜 세월인데 고려와 조선의 천년 인고의 무게를 이겨내고 칠곡의 아름다운 전설의 유구한 향기를 간직 한 체 “약목(若木)”의 역사는 오늘도 살아 숨 쉬고 있다.

     

     

    2014년 6월 11일 매원 곡촌 향토사학 이 수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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