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독자기고] 한강(寒岡)공원 대구의 자랑

기사입력 2014.07.08 08:55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세종대왕 다음 현군으로 칭송받은 정조대왕 당시 학자와 정치가로 명망이 높았던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은 실학자 이익(성호(星湖))의 비문을 쓰면서 퇴계는 동방 성리학의 최고이며, 그 학문을 정구(한강)에게 전수하였고, 한강(寒岡)은 과거에 급제 못한 유림으로 영의정에 오른 허목(미수(眉叟))을 제자로 삼았다. 미수(眉叟)를 스승으로 한 성호(星湖)는 영남 퇴계학맥을 기호(충청, 경기)지방까지 전수하면서 목민심서의 정약용과 같은 훌륭한 실학자를 배출하였다.

     

    광해군시절 한강(寒岡)은 나라걱정과 학자적 양심으로 국정의 잘못을 상소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낙향하여 학문과 제자들 육성에 전념하고 신선과 인간이 더불어 산다는 무휼구곡의 청빈한 일상생활에서 한가로운 여백의 시 한수가 돋보인다. (小山小家 滿園梅菊 雲水粧如 生涯我最)

     

    즉, 작은 산골 아담한 초막집 마당에 매화, 국화 가득 심어놓고 물위에 구름 가듯 자연을 벗삼은 한가한 삶이 내 생애에 최고의 사치한 삶이라고 예찬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같은 삶의 향기와 함께 소박하고 정취로운 시라 하겠다.

     

    이원정(문익공)의 귀암 문집에는 한강(寒岡)은 낙향의 야인이면서도 직언 상소로 왕과 정적들에게 미움을 받아 한 곳에 오래 거처하지 못하고 제자인 석담과 이윤우(석담(石潭))와 장현광(여헌(旅軒))의 고향 칠곡 노곡방으로 이사하여 곧음의 상징인 늘 푸른 대나무를 심고 가꾸며 삶의 품격을 높였다.(蘆谷房 東江東岸 鄭逑種竹之所也)

     

    한강(寒岡)은 성주 회연서원을 떠나면서 한 수레의 서적만 실고 가실 노곡동으로 거처를 옮겨 실학인 경산지(京山誌)를 집필하면서 화재의 참사를 만나 하늘이 나를 버린다하고 나이를 탄식하면서 제자 이윤우(석담)에게 경산지 창간을 부탁하고 금호강이 굽어보이는 사수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안산의 문필봉(文筆峯)을 마주하고 용이 누운듯 와룡(臥龍)산을 울타리 배게 삼아 오직 자연과 학문을 벗하며 여생을 마쳤다. 왕명으로 문목공(文穆公)시호와 함께 영의정으로 추증 받고 또한 국반 불천위로 자자손손 후손과 유림에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최근 한강(寒岡)이 거처한 마지막 학문의 전당인 사수동에 대단위 아파트가 조성되면서 대구의 관문이면서 풍광이 수려한 자리에 대구시는 12,000여평의 귀한 땅을 희사하여 한강(寒岡)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와룡산 계곡따라 무휼구곡의 재현을 계획하고 매난국죽 사군자로 단장을 하면서 울창한 송림의 동산에 한강정사의 빼어남은 수려한 강과 와룡산세가 어울려 위용과 품위가 대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선견지명인 대구의 높은 문화적 창의성에 삼가 경의를 표한다.

     

    2014년 6월 2일 매원 곡촌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