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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담명(정재공)의 영세불망비

기사입력 2014.04.2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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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라의 기둥뿌리를 위협한 당파싸움은 임진왜관을 몰고 온 치욕적 국난을 당했으면서도 또 다시 명분을 앞세운 예송 논쟁 등으로 당쟁이 더욱 치열한 조선 중기에 담명(聃命)은 1646년. 탄생하여 생원시 과거에 수석으로, 대과에는 아헌으로 등용된 탁월한 정치행정가이며 학자로서 파란만장한 한세상을 살았다.

     

    ▲ 칠곡군 왜관읍 애국동산에 있는 영세불망비

     

    아버지 이원정(문익공)은 기호지방 영의정 허목(미수)과 함께 퇴계학맥인 남인의 영수로 서인들에 의한 억울한 역모사건으로 당쟁에 휘말려 장살의 참형을 당하였다. 피로 물들인 아버지의 장삼을 9년이나 입으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처신으로 돌아가신 가친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임금(숙종)으로부터 문익공 시호와 함께 영의정 추서를 받아 부모님의 신원을 복원시켰다.

     

    영남지방의 계속된 가뭄과 기근으로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고자 덕망을 두루 갖춘 정재공을 경상감사로 천거했다. 때마침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나라의 세곡을 강제 하선시켜 구휼미로 영남의 70고을 백성들에게 배고픈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즉 “선지급, 후결제”였다. 오직 백성을 위한다는 지극한 애민사상이었지만 당쟁의 정적들에게는 역적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정재공은 격문의 상소에서 “백성이 배가 고파 죽음 직전의 어려움인데 왕명을 결재받아 다시 세곡을 나누려고 하면 이미 만백성들이 다 굶어 죽었다면 귀한 곡식인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라는 상소문은 시대적 사회상황과 함께 명문장이며 오늘까지도 임금에게 올린 진정록(賑政錄)2책은 문화재로 귀중하게 보관되어 있다.

     

     

    백성을 위한 공덕이 크기에 영남 유림의 청원과 함께 정재공의 영세불망비가 칠곡 도호부 관아에 세워져 있다가 개발로 인하여 대구 부 경상감영공원 자리로 옮길 계획을, 반대한 광주이씨 문중과 지방 유림의 항의로 왜관의 애국동산으로 이전되어 오늘도 호국의 낙동강을 굽어보며 유구한 자태로움을 더하고 있다.

     

    당쟁의 희생으로 노모를 두고 귀양을 떠나면서 어머님을 생각하는 애틋한 효심의 사친곡(思親曲)은 12장으로 그 시절에는 귀한 한글의 문장이며 우리 국문학과 시조문학에 중요한 참고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1장의 내용은 “봄은 또 오고 풀은 푸르고 또 푸른데, 나도 이 봄 보고 이 또한 푸른 것처럼, 언제 어느 날 고향에 돌아가 어머님을 뵐 수 있으리요” 아버지 문익공은 나라의 불천위로 추앙되고 아들 정제공 또한 유림의 불천위로 향사 받았다. 이는 가문의 영광이며 또한 칠곡의 자랑이라 하겠다.

     

    석전리(돌밭)에는 할아버지 이도장(낙촌)의 낙촌정(落村亭)을 중심으로 아버지 문익공의 경암제(景巖濟)와 손자 정재공의 소암제(紹巖濟)가 품자형 맏배지붕으로 한 울타리내 이름하여 동산제(東山濟)라 한다. 동산에는 고색이 창연한 송죽의 절개와 더불어 아담한 연당은 선비의 높은 품격과 함께 선조를 기리는 자랑스런 명당이며 또한 지방문화재로 잘 보존되어 있다.

     

    2014412일 매원 곡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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