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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금낙정(琴洛亭)[독자기고]왜관농협 이수헌 조합장

기사입력 2012.07.20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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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대간이 팔공산으로 이어지고 칠곡의 관문인 가산의 큰 지맥은 황학산 정상으로 크게 솟았다가 동남을 향해 백운산(白雲山)을 같이하여 마지막 큰 줄기가 건령산(建靈山)에 자리매김한 것은 그 이름처럼 예사롭지 않는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건령산 정점 상단 가까이에는 500년을 지켜온 자기성찰과 학문의 전당인 금낙정(琴洛亭)이 최근 산불로 인하여 흔적 없이 사라지고 우람한 느티나무만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홀로 옛 주인의 복원을 기다리는 듯한 모습이 오히려 안타까움으로 다가 선다. 또한  금낙정 샘터의 물줄기가 실개천을 이루며, 수호신과도 같이 의젓한 느티나무와 함께 금낙정 주변을 도란도란 속삭이는 물소리는 유구한 태고적 정취를 물씬 자아낸다.

     

    금낙정(琴洛亭)

     

    불에 탄 건물 축대 나무 그루터기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먼 시야에는 연 봉오리 같은 올망졸망한 수많은 산들이 붉은 석양에 물안개와 더불어 한 폭의 수채화 같다. 그 앞으로 태백산에서 발원된 낙동강과 팔공산에서 시작한 금호강이 함께 만나 어우러짐은 주변의 자연과 인간의 삶을 더욱 생동적으로 역동화 되어, 굽이굽이 멋들어지게 휘감아 도는 강물의 수려한 모습에는 자연의 섭리가 어디까지인지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이렇게 빼어난 운치와 아름다운 풍광의 정점에 인부(仁符)공께서 구례현감 재직중 기묘사화(1519년)에 간신들의 모함으로 조광조를 비롯하여 종반숙질이 참화를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금(琴)호강과 낙(洛)동강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금낙정(琴洛亭)과 세심정(洗心亭)을 지어 유유자적했던 한가한 풍요로움은 옛 선조들의 넉넉한 인생관과 자연관에 그저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건령산 주령의 금낙정을 뒤로하고 다시 기맥의 흐름은 서남쪽을 향해 내리면서 한 자락은 주봉(柱峯)으로 솟았다가 남쪽의 끝자락은 녹봉(鹿峯)을 만들어 그 속에 조선중기 실학의 거점인 녹봉정사(綠峰精舍)를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 광주(廣州)이씨 칠곡 입향조 이지(李摯)가 일찍이 주봉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이 곳 금낙정은 칠곡군이 호국과 순교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했다. 낙동강 다리를 교두보로 한 다부동 유학산 주 전선까지의 일진일퇴는 능선을 온통 피로 물들게 한 처절한 사연과 함께 대구와 부산을 사수한 호국의 길목이요 버팀목으로 조국을 지킨 천년요새이며 장자방과 같은 지혜로운 요충지다.

     

    후세의 사가들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인천상륙작전, 그리고 6.25 전쟁 당시 낙동강을 교두보로 하여 다부동 전투가 세계 3대 전투로 기록될 만큼 처절하고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이곳이 호국의 땅으로 명명(命名) 되기 전에는 조선말기 천주교 대박해 때, 신나뭇골, 한티성지의 중간 기착지로 일찍부터 금낙정은 순례길의 역경과 고단한 목마름으로 쉬어가는 쉼터 역할을 했다. 정다운 돌담길과 축대, 샘터의 맑은 물은 지나는 신도들에게 박해의 아픔을 잠시나마 어루만져 주었으리라 짐작해본다. 호국의 발자취와 순교의 발자취가 겹겹의 인연으로 역사를 이룬 이곳은 칠곡을 알리고 칠곡을 기억하게 할 대표적인 브랜드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얼마전 광주이씨(현감공) 종회에서 금낙정 대지를 칠곡군청에 기부했다. 칠곡군은 호국과 순교의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군민의 여가선용을 위하여 금낙정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현감공 종회의 금낙정 사회 환원에 대해 크게 환영해 맞이하며 이제까지는 집안 종중만을 위한 소유개념에서 많은 군민과 주민을 위해 다 같이 나누며 즐기는 공유개념으로 사회에 기증한 대승적 큰 결단에 감사할 따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칠곡 광이 출신 이심옥(도사공, 무과 종5품)은 현감공 인부의 손자로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망우당 곽재우 장군과 연합하여 왜군과 치열하게 싸울 당시 이심옥공의 고향에는 벌써 왜군이 당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현풍 곽씨에 출가한 딸(곽재우 동생 곽재기의 처)이 친정모친과 함께 낙화담 못에 몸을 던져 수절하는 참화를 겪고, 온 집안이 화를 당하는 가운데도 충직한 종 수남은 이심옥(心玉)의 여덟 살 어린 장손을 피신시켜 대를 잊게 하고 상전인 모녀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장례를 치루었다. 그 은혜를 잊지 않고 후손은 충노수남지묘(忠奴守男之墓)라는 표석을 세우고 오늘까지 각별한 예우를 하고 있으며, 그 묘지가 지천면 심천리 옛 상전의 묘지 아랫자락에서 영생을 같이하고 있다.

     

    또한 모녀의 수절한 참상에 인조 임금(1643년)시절 열녀비를 나라에서 책록 받아 쌍열각을 세워서 오늘까지 후손이 지키고 있다. 이러한 참혹함을 당한 이심옥공은 세월의 무상함에 환멸을 느끼고 벼슬을 버리고 심천(深川)고향에 내려와 후학을 위한 강학과 자기성찰에 전념하고자 현감공 할아버지께서 지어놓은 금낙정과 함께 심천의 깊은 계곡따라 세심정(洗心亭)에서 세상을 삼가하면서도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으며, 그의 소박하고 진정한 삶의 모습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원모제(遠慕齊)를 지어 일가 백대지친하라는 모임의 장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중한 역사의 현장들이 모두 퇴락을 거듭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감을 안타까워하고 있던 중, 최근 칠곡군에서는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옛것을 복원하는 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음에 이것이 진정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행정이 아닐까 찬사를 보낸다.

     

    ▲ 글 = 이수헌

    왜관농협 조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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