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oyalblue face=굴림 size=3>[기고] 가산산성(架山山城)세계적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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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가산산성(架山山城)세계적 문화유산

단군역사 5천년 국치의 날,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은 백성을 버리고 삭풍의 변방 함경도까지 달아나는 수모를 당하고 병자호란에는 또 다시 조선의 인조임금은 황망히 피신했던 남한산성을 내려와 청나라 왕에게 군신(君臣)의 예로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조선5대 명정승인 이준경(동고)과 이이(율곡)가 국방을 튼튼히 하라는 10만양병설 주장을 무시하고 끈임 없는 당파싸움 궁중사화로 3족을 멸하는 등 피바다의 소모적 쟁패전은 급기야 외침을 불러 오면서 금수강산 초토화에 불안을 느낀 인조는 갑자기 남한산성에 버금하는 가산산성 신축을 명(1648년)하였다.

 

강제동원 불만과 함께 부역으로 일 년 만에 내성은 완공되었지만 백성들의 농번기와 함께 원성이 많아지면서 시공책임 경상감사 이명웅을 좌천하고 그 후 외성은 숙종 임금이 완공하고 중성은 영조 왕이 완성(1741년)하면서 100년 세월에 영남제일 관방(嶺南 第一關防) 가산산성은 어렵게 구축하였다.

 

조선의 성(城)들은 삼면이 바다이기에 외침의 접근이 쉬운 취약함에 평지 도시읍성(邑城)들이 많았지만 한반도 내륙 이동경로 중요성과 함께 부산포(浦)와 염포(울산) 내이포(진해)에서 한양을 향하는 영남 3대로는 낙동강 물길 따라 문경세재와 이화령을 넘어 남한강과 연결 한양 길 동맥 역할을 하였기에 낙동강 금호강 합수의 상단에 위치한 천생산성과 금오산성은 겹 울타리 파수꾼 역할의 요새였지만 강과 육로의 중요성을 겸한 보완적 가산산성이 절실했다.

 

또한 천생(天生)산성은 하늘이 내려준 산성이었으나 산정이 협소하고 우물이 없어 불편했으며 금오(金烏)산성역시 높고 험준함에 지키는 수비 형 산성 이였지만 가산산성은 의성 군위 경산 하양 영천의 신평현(縣) 등 많은 속현을 거느리며 내성(內城) 남창(南倉)과 외성(外城) 북창(北倉)과 함께 많은 전쟁물자 비축 등으로 공격과 방어를 위한 영남제일 관방이며 전략적 요충지였다.

 

가산산성은 백성들의 민원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180년간 나라의 중책인 칠곡 도호부(부사 종3품)가 유일하게 산성 내에 위치하고 암구(暗口), 곡성(曲城), 무진장 돌너덜 암괴 등 문화제적 가치의 심층 연구와 더불어 세계최대 자생군락지로 행운의 상징인 귀한 복수초(福壽草)일명 설연화(雪蓮花) 자생식물들과 함께 다람쥐 야생조류 등 다양한 자연생태계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을 위한 탐구가 중요한 과제라 해야겠다.

 

칠곡군은 문화제청의 자문과 함께 가산산성 장기복원계획(25년)에 의하면 세계문화유산으로의 목표와 더불어 궁극적으로는 자연생태계 세계문화유산으로 까지 추진한다는 다짐은 칠곡의 미래성장 동력을 위한 쾌거라 하겠다. 그러나 우리들의 문화적 눈높이 수준과 함께 군민 모두의 참여와 관심만이 복원계획을 더욱 앞당기면서 또한 귀중하게 유네스코 문화유적으로 등록할 수 있는 절호의 지름길임을 유념해야 하겠다.

 

 

2015년 9월 23일 칠곡 향토사학 곡촌 이 수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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