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royalblue face=굴림 size=3>[독자기고] 칠곡개청 100주년을 맞이하며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피니언

[독자기고] 칠곡개청 100주년을 맞이하며

조선시대의 경상도는 8도중 한 지역이었으며 초기 조선은 경주부(府), 상주부(府), 안동도호부에서 필요에 따라 경상감영의 역할을 겸임 하였다. 칠곡 또한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종삼품의 칠곡 부사가 경상감영의 역할도 하였다.

 

특히 가산산성은 몽고군의 침입과 임진왜란 등 잦은 외침에 대비하고자 내성, 외성, 중성을 3겹으로 100년에 걸쳐 쌓아 칠곡 도호부의 중요한 역할은 물론 요충지인 영남의 수문장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선조 시대에 규모가 작은 대구읍성을 확대 개편하여 경상감사가 대구에 상주하는 대구부(府)로 승격하기 위하여 경산부(성주)에 예속된 칠곡의 옛 지명인 팔거현을 대구부로 편입하자는 나라의 조정안이 확정되었고 이에 칠곡 고향에 낙향해있던 이도장(낙촌)은 즉각 “팔거현 청물속 대구부소”(八筥縣 請勿屬 大邱附疏)라는 상소를 올리었다.

 

상소의 내용인즉, 낙동강 돌밭 나룻터는 물류의 중요함을 더하면서 왜국 사신과 상인들이 상주하고 자주 강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팔거현 노곡방 중심으로 왜구들을 관리하기 위한 편의상 팔거현을 그대로 두자는 상소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면서 그 후 칠곡 도호부가 오늘의 칠곡 탄생의 인연을 만들었다.

 

이도장은 호가 낙촌이며 대과에 급제하고 나라와 임금의 사초를 기록하는 요직인 주서와 한림에서 대제학으로 추증 받았으며 영남 광이의 중흥조인 이윤우(석담)가 아버지이다. 아들 이원정은 국반 불천위 문익공 시호와 함께 영의정의 귀함도 교지 받았으며 손자 이한명(낙애)은 대과에 등용대어 4대가 내리 한림의 벼슬을 책록 받았다. 500년 조선 선비 사회에서 전무후무한 칠곡의 자랑이라고 하겠다.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 긴급 대피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 왕에게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청 왕은 강하게 전쟁을 주장한 많은 조선중신들의 명단을 요청했다 이도장은 너희 나라와 형제의 예로 화친을 하고 화합을 위한 경축일에 불행은 줄이자면서 요직인 주서(主書)의 자격으로 삼학사 (홍익한,윤집,오달제)만 청나라에 죽음의 인질로 보내고 국난을 무사히 끝내었다.

 

400여년 전 이도장은 고향 사랑하는 애민사상이 간절하였기에 오늘의 칠곡 백주년을 맞이할 수 있는 좋은 인연을 만들어 준 감회가 새로우며 그 뜻을 숭모하고자 이도장의 낙촌정을 중심으로 경암제, 소암제를 통칭 동산제 라고 한다. 일가친척은 백대지친 하고 후손에게 금광주리보다 서책 한권을 더 물려주라는 둔촌 시조의 유훈을 따라 학문적으로도 3대(낙촌 문익공 정재공)를 기리는 문화재로 지정된 인문학적 동산제의 낙촌정은 오늘도 우리들 곁을 같이하고 있다.

 

 

2014년 7월 14일 매원 곡촌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