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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독자기고] 쌍열각(雙烈閣)은 칠곡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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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화담

임진왜란(1592년 선조25년) 당시, 왜군은 부산포와 염포인 울산 등의 지리적 유리한 길을 이용하고, 전선 이동이 편리한 낙동강 물길 따라, 가파르게 조선반도를 유린하고 강탈하였다.

 

도사라는 벼슬의 양반 가문이면서 무반 기질을 타고난 구례현감을 지낸 인부(仁符)의 손자 심옥(心玉)은 지천면 심천리에서 태어났으며 고향에서 나라의 재난인 악랄한 왜구의 침략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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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과 창녕을 경계하며 화왕산성을 중심으로, 의병대장 곽재우(망우당)와 이심옥(廣洲)은 사가간이면서 사돈지간 이었다. 또한 나라를 위한 의기투합으로 의병을 독려하며 국난을 같이 걱정하였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으로 대구 부(府)가 일찍이 함락되고, 인근인 칠곡 지천이 점령당하면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의병활동을 한 이심옥의 처와 가족들이, 선발된 왜군의 정찰과 염탐에 의해, 포로 신세가 되기 직전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부인은 먼저 대를 이을 아들을 종에게 부탁하여, 인근의 깊은 산속에 숨기어 참화를 면하였다. 그러나 더욱 큰 안타까움은 망우당의 아우 곽재기에게 시집간 딸이 출산을 위하여 때마침 지천인 친정에 있다가 모녀가 함께 위급한 상황을 당하였다.

 

두 모녀는 왜구에 포로가 되어 능욕을 당하기보다 인근 저수지인 낙화담에 뛰어내려 고귀한 슬픈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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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열비

그 후 나라의 난리가 평정되고 조정에서 이심옥의 부인과 딸을 사회적 사표와 함께 모녀를 추모하가 위한 쌍열각을 새웠다.

 

이와 같이 기구하고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부인에게는 친정이요 딸에겐 시집인 현풍 곽씨 가문을 빛낸 12 조상의 정려각 중에 2분 모녀를 지금도 곽씨 문중 후손들에 의하여 정성으로 모셔지고 있다.

 

또한 종의 몸으로 주인의 아들을 살리고, 살벌한 왜군의 눈을 피해 밤중에 산천에 버려진 모녀의 시신을 수습하고 안장하여준 고마움에, 후손들이 충노(忠奴) 수남지묘(守男之墓)라는 비석을 새워 쌍열각과 함께 오늘도 정성을 다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이심옥은 임진왜란을 평정하고, 처와 가족을 잃은 허망함에 심천계곡 고향마을에 돌아와 세심정사(洗心精舍) 에서 자연을 벗하고 학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내었다.

 

무분별한 난개발과 쌍열각의 퇴락함을 걱정한 후손과 행정당국이 다 같이 힘을 모아 공원화를 추진하면서 중수화 계획을 세웠다니 반가운 소식이라 하겠다.

 

건령산 정상 금락정(琴洛亭)에서 저 멀리 낙동강 금호강의 합수하는 수려한 물길의 노을 따라 산길을 내려오면 모녀의 쌍열각이 엄숙함을 더하면서 맞이하고, 이와 함께 충노 수남지묘가 이끼 먹음은 창연한 비석의 무게로움이 수문장처럼 충직스럽게 돋보인다.

 

그리고 속세를 비켜나듯 한적한 계곡에 위치한 세심정의 단아한 모습은 세상사의 번뇌한 마음을 씻어 주는 듯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그리고 조상을 추모하고 일가는 백대를 친하게 지내라는 원모제(遠慕齊)가 그 오랜 격랑의 세월에도 군자의 반가움으로 맞이하는 듯 경건한 자태로움이다.

 

건령산 자락인 지천면 심천리의 한 고을에서 유구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간직한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복원하고 개발하면서 밸트화 하여 지방 문화제로서의 가치적 격상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2013년 12월 매원곡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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